본문 바로가기
드라마, 영화

고려거란전쟁 속 역사 - 2차 고려-거란 전쟁(통주전투, 현종 피난, 개경 파괴, 강화)

by 인in
반응형

흥화진을 우회한 거란군이 다음으로 고려군과 마주친 곳은 통주(通州)였다. 

바로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조는 먼저 자리를 잡은 지리적 이점에 검차를 이용한 전술 활용으로 초반에 잘 방어하였지만, 후반에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방심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통주전투에서는 강조뿐만 아니라 부장 이현운 등 다수의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력도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다.

 

https://youtu.be/R0pTHxE7L3Q?si=6840nU9VmcS3phHb

 

 

다행히 통주성(通州城)은 함락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무너지면서 고려군의 전열은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https://youtu.be/ClT3ufPcBcM?si=D4HwlO6b7eg8UYW4

 

비록 서경(西京)은 힘겨운 전투 끝에 지켜낼 수 있었으나,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려 국왕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피난길에서 현종은 갖은 고초를 겪었고, 거란군에게 점령된 개경도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고려거란전쟁 포스터 - 불타는 개경 궁궐 이미지

 

 

현종은 결국 친조(親朝), 즉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의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양규를 비롯하여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수많은 포로를 구출하며 거란군을 괴롭혔다. 

 

비록 양규가 전투 도중 목숨을 잃는 등 고려의 피해도 컸으나, 끝까지 거란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참고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200300

 

우리역사넷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거란과 고려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국지적인 전투까지 포함하면 횟수가 매우 많으나, 크게 나누어 993년(성종 12)의 1차 전쟁, 1010년(현종 원년)의 2차

contents.history.go.kr

 

한국사 공부할 땐 히스토링 https://www.historing.kr/

 

한국사 공부할 땐 히스토링

 

www.historing.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