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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화

고려거란전쟁 속 역사 - 양규의 활약(흥화진 전투, 곽주 탈환, 고려 포로 구출)

by 인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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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楊規)는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살았던 고려의 관리였다.

 

고려거란전쟁 양규 - 지승현 배우

 

 

2차 고려-거란 전쟁 중에 적군의 후방이 된 서북면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수많은 포로를 구출했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안타깝게 전사하였다.

전쟁 이전의 양규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선왕 목종(穆宗) 시대에 관직 생활을 하면서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강을 건넌 거란군은 고려군의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당시 양규는 도순검사로 부임해 있었고, 흥화진의 책임자인 정성, 이수화, 장호 등과 함께 성을 지켰다.

 

거란 성종은 압도적인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우선 회유책을 택했다.

 

통주성 인근에서 고려 백성들을 잡아 비단옷을 내려주고, 군사들로 호위하여 흥화진에 보내 자신의 편지를 전하게 한 것이다. 편지에는 거란을 섬기던 목종을 시해하고 새 왕을 세운 강조를 잡으러 온 것이니, 그를 체포하여 보내면 군대를 돌릴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성문에 편지를 매단 화살을 쏘았는데, 이 편지에는 위의 이야기를 적은 뒤 강조의 협박이 두려워 따랐던 자들은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 하였다.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와 이수화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낸 글에서 이수화는 “찬 서리와 눈보라를 견뎌내면서 더욱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며,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길이 천년의 성스러운 〈왕업을 〉 받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성종은 이 글을 보고 흥화진이 항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성종은 절반의 병력을 인근의 인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나머지 절반을 데리고 통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통주 인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대파하였다.

 

고려군을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은 거란군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이것이 위조라는 것은 탄로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양규는 이렇게 말하며 거부했다.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국왕으로 받은 명령, 즉 이 지역을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북면의 모든 지역이 흥화진처럼 버텼던 것은 아니다. 곽주를 지키던 조성유는 도주하고, 신녕한 등 여러 관리와 장수들은 곽주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곽주에 6천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이동했다. 총 40만이라는 병력이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병력의 절반이 후방에 남아 있었으니 서북면에 남은 거란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바로 이 때, 양규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함락되지 않았던 인근 통주로 가 1,000명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밤에 곽주로 들어가 기습을 감행하여 6천 거란군을 모조리 목베었다.

 

https://youtu.be/ypkjFqJAwFk?si=d9Zyz1sOtnufRrkM

 

 

거란군의 방심이 컸던 것 같지만, 엄청난 대승이었다. 1010년(현종 1) 12월 16일이었다.

 

이후로도 양규는 유격전을 치열하게 펼쳤다.

 

귀주의 별장이었던 김숙흥 등도 역시 후방의 거란군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다.

양규는 이듬해 1월에도 무로대와 이수, 석령, 여리참, 애전 등에서 거란군과 격전을 벌여 6,500여 명을 죽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들이 한 달 동안 일곱 번의 전투를 벌였다고 하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거란군이 주둔한 서북면 지역에서 은밀히 이동하며 큰 타격을 입힌 양규와 김숙흥 등의 유격전의 성과는 매우 컸다. 

 

그런데 이 때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실 따로 있다. 양규에 관한 기록에는 거란군 몇 명을 죽였는지에 대한 기록과 함께, 포로가 되었던 고려 백성 몇 명을 구출했는지가 함께 적힌 경우가 많다. 양규가 구출한 백성의 수는 매우 많았다. 처음 곽주에서 7,000명, 무로대에서 3,000여 명, 이수와 석령에서 1,000여 명, 여리참에서 1,000여 명. 그 외에 다른 곳에서 구출한 인원을 합치면 3만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양규의 결사적인 싸움은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1011년(현종 2) 1월 28일, 양규가 애전에서 거란의 선봉대를 습격하여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얼마 뒤 거란 황제가 이끄는 본대가 양규의 부대를 덮쳤다. 양규와 김숙흥은 종일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문종이 두 사람의 초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걸게 하면서 내린 제서에서는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라고 하였다. 

 

https://youtu.be/aP_FUcc-Qc8?feature=shared

 

 

전쟁이 끝난 후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추증하였다. 양규가 무장이 아니라 문신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현종은 또 그의 부인과 아들에게도 곡식과 벼슬을 내려주고, 양규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리고 다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봉하였다. 이후로도 양규의 후손들은 여러 번 왕실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양규 등의 치열한 전투는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2차 전쟁 당시 강화를 맺는 순간까지 고려는 완전한 패배를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전쟁의 마지막 장면은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라고 묘사되었다. 

 

 

훗날 개경으로 돌아와 이 보고를 받은 현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후 현종은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아마도 강화할 때에 약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친조(親朝)도 병을 핑계로 하지 않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것이면 강동6주 지역을 내놓으라는 압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이 지역을 노린 수차례의 공격도 대부분 격퇴시켰다.

 

나아가 1018년(현종9)~1019년(현종 10)에 벌어진 3차 전쟁에서는 철저히 준비된 군사력으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을 거두어 거란의 침공을 완전히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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