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은 자신의 조카인 왕송을 990년(성종 9)에 개녕군(開寧君)으로 책봉했고, 궁궐에서 기르며 학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997년(성종 16)에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불러 차기 국왕으로 삼았다.
18세의 나이로 고려의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한 왕송이 바로 목종이다.
목종대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여 자세한 통치 활동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이 시기의 특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의 깊숙한 정치 관여라는 상황이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외가 쪽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손을 잡고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그런데 이 김치양이라는 인물은 일찍이 성종대부터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고 있다고 지목되어, 성종에 의해 장형(杖刑)에 처해지고 귀양을 간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천추태후와의 결탁을 바탕으로 권력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1003년(목종 6)에는 이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하였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심각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고 한다. 아직 아들이 없는 목종의 상태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https://youtu.be/r1_Gru_6e24?si=333Lpo94isSlv1lK
그리고 그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제거하려 하였다.
목종보다 12세 아래였던 대량원군 왕순은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태조 왕건의 손자였다.
태조 왕건과 신성왕태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욱이 그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 황보씨였다. 왕순은 경종의 사후에 왕욱이 헌정왕후와 정을 통하여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헌정왕후는 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이었다.
헌정왕후와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성종의 여동생이었으며, 당시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사촌오빠인 경종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왕순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측 모두를 통해 직접적으로 태조 왕건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장 순혈의 왕족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이보다 왕순이 목종 사후의 왕위계승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천추태후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 왕순은 절에 머물렀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찍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왕순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절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천추태후에 의해 지속적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목종의 후계를 둘러싸고 복잡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궁궐에 크게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목종은 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병이 들었고, 급기야 정사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목종은 자신의 측근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외부와의 소식을 차단하고, 이들과 후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목종은 신임하는 신하였던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논의를 하였고 목종은 왕순을 후계로 삼으려 한다고 하며 그를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채충순은 왕순을 맞이해올 계획을 세웠고,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에게 소수의 군사를 데리고 목종의 친필 편지를 가져가 왕순을 궁궐로 맞이해 오게 하였다.
또한 군사 100명을 개경 교외로 보내 왕순이 오는 길을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호위를 맡기려 하였다. 목종의 이러한 신속한 조치에 김치양은 며칠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강조가 조정 내 권력투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목종이 우군으로 삼기 위해 소환한 강조가 왜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참고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200200
한국사 공부할 땐 히스토링 https://www.histori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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