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고려-거란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승진을 거듭하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한편, 종전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거란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친조를 할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귀환길에 고려군의 지속적인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거란의 성종은 이에 크게 분개하여, 강동6주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물론 고려는 이를 거부했고, 양국 간에는 압록강 일대에서 국지적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고려는 거란의 공격을 대체로 잘 방어했으나, 압록강을 건너는 거점이 되는 지금의 의주 일대는 빼앗기고 말았다.
긴장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결국 1018년(현종 9)에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을 지휘관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이라 기세를 올리며 고려를 침입했다.
이를 대개 3차 거란의 고려 침입 이라 부른다.
현종은 이에 맞서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거란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하였다.
강감찬은 먼저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흥화진 근처의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큰 냇물을 소가죽을 엮어 막아둔 채로 거란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거란군이 근처에 도달하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흘려보내고 복병을 출동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고려군의 기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소배압은 계속 개경을 향해 거란군을 진격시켰다.
이에 고려군은 강민첨이 자주(慈州) 일대까지 추격하여 다시 큰 피해를 입히고, 조원이 또 마탄에서 요격하여 1만여 명 이상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병력을 잃으면서도 소배압은 개경을 향해 돌격했다.
이에 강감찬은 개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급히 개경으로 가서 합류하게 하였다.
또한 동북면 병마사도 3천 3백의 병력을 개경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하였다.
고려군의 거듭된 요격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에서 백 리 떨어진 신은현까지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왕 현종은 이번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청야 전술을 펼치며 거란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었다.
소배압은 척후 기병 3백을 금교역 방면으로 보냈으나, 이들은 출동한 고려군 1백 명의 기습으로 전멸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결국 소배압은 군대를 돌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감찬은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거란군을 요격하여 5백 명 이상의 목을 베고, 마침내 귀주 일대의 평야에서 거란군과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양군은 막상막하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김종현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하자 승세는 고려군 쪽으로 돌아섰다.
패배한 거란군은 탈주하여 겨우 압록강을 건넜으나, 그 수가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를 보통 귀주대첩이라 부른다.
거란 내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던 소배압은 이 패전의 결과 문책당하여 좌천되고 귀양을 떠났으며, 비록 얼마 뒤 복귀했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대승을 거둔 강감찬은 국왕 현종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현종은 개선하는 강감찬과 고려군을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아가 맞이하며 크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강감찬에게는 특별히 금으로 만든 꽃가지 여덟 개를 머리에 꽂아주고, 직접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 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과 화의를 청하였다.
지속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거란은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는 거란에 대해 조공을 보내고 사대의 예를 지켰으나, 거란 역시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였다.
* 귀주대첩은 민족기록화로 1982년 우표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참고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203010
한국사 공부할 땐 히스토링 https://www.historing.kr/
두산백과 귀주대첩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기록화 시리즈(제2집) 우표정보 - 원화 http://stamp.epo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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