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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18쪽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217쪽
안중근이 쏘고 나서 제압당할 때 러시아 헌병들이
- 야포네츠?(일본인이냐?)
- 코레예츠?(한국인이냐?)
라고 묻자 안중근은
-코레아 후라.
라고 소리쳤다.
러시아 헌병대가 그렇게 보고해왔다.
안중근은 '후라'가 '만세'라는 뜻으로 세계 공통으로 쓰는 말이라고 진술했다.
231쪽
마나베는 우덕순에게 물었다.
-안은 왜 이토를 죽이려 했는가?
-그것을 안중근에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
-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235쪽
-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238쪽
-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 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66쪽
하얼빈은 내가 이토를 죽인 자리이므로 거기는 우선 내가 묻힐 자리다.
한국이 독립된 후에 내 뼈를 한국으로 옮겨라.
그전까지 나는 하얼빈에 묻혀 있겠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내 뜻에 따라다오.
282~283쪽
안중근은 1910년의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날 미사의 강론에서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가지 과오를 범한데에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는 대희년을 맞아서 '쇄신과 화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하고 한국 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떄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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